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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

우주탐사의 역사 Ⅰ

by mama maison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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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사고력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손발이다. 인간은 지구에 문화권을 형성해 생활의 안정을 찾자마자, 2000년 전부터 벌써 지구를 떠나 우주공간으로 달리는 꿈을 키워왔다. 한편, 1232년에 중국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을 몽골군이 포위했을 때, 수비에 나선 송나라 군대가 원통형의 대나무 속에 검은색 화약을 넣고, 기름이 묻은 심지에 불을 붙여 화살에 매달고 날려 몽골군을 혼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화전이라 했는데, 바로 오늘날 로켓의 전신이다. 1258년에 몽골군은 이것을 배워서 바그다드 공격에 사용했다. 아랍인이 다시 이 화전기술을 받아들여 프랑스에서 침공해온 십자군을 물리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으로 전파된 화전을 로켓으로 부르게 된 것은 14세기 말경이다. 로켓은 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인 로케타를 쓴 데서 유래한다. 이 로켓이 우주여행의 유일한 수단이 된다고 처음 간과한 사람은 러시아의 물리학자인 치올콥스키였다. 1883년에 치올콥스키는 우주라고 하는 진공 속에서 스스로 날려면 오로지 반작용을 원리로 한 분사식 추진장치인 로켓을 이용하는 수 밖에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바로 뉴턴이 세운 운동의 제 3 법칙에 따라서만 우주비행이 가능하다는 원리를 처음으로 밝인 것이다. 1897년에는 로켓비행의 공식을 이끌어냈다. 또 다단식 로켓을 고안했으며, 액체 수소와 산소 혼합제나 케로신과 액체 산소 등을 로켓의 추진 연료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우주여행의 방법과 이론은 치올콥스키가 처음 제창했지만, 로켓을 실제로 만드는 데 선구자 노릇을 한 사람은 미국의 물리학자인 고더드였다. 고더드는 1926년에 처음으로 액체 연료를 이용한 로켓을 만들어 쏘아올렸는데, 비행시간 2.6, 비행고도 56m로 하늘을 날았다. 이것은 우주여행에 돌파구를 연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나,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1935년에 방향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가 달린 로켓을 쏘아 올렸다. 비행고도는 1400m, 평균시속은 880km였다. 고더드의 연구는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고더드를 현대 로켓의 아버지라고 한다. 로켓 개발에 중요한 일을 한 또 한 사람은 독일의 과학자인 오베르트이다. 1922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행성간 비행을 위한 로켓]을 제출했으나 이해하는 학자가 없었다. 그러나 오베르트는 1931년에 가솔린과 액체 산소를 사용한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또한 오베르트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사용한 장거리 로켓인 V-2 미사일과 새턴 5호 로켓을 개발한 독일의 공학자인 폰 브라운을 키워냈다.

그리고 인공위성시대로 돌입이 되었다. 195710월에 옛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 인공위성은 무게가 83.6kg으로 근지점 227km, 원지점 947km의 타원궤도를 그리며 지구를 돌았다. 또한 한 달 뒤인 11월에는 무게가 1호의 6배나 되는 508.3kg의 스푸트니크 2호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우고 쏘아올렸다. 당황한 미국은 몇 번의 실패 끝에 다음 해인 1958년에 스푸트니크 2호 무게의 1/34밖에 안 되는 15kg짜리 익스플로러 1호를 인공위성 궤도에 쏘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두 번째 인공위성을 같은 해에 쏘아 올렸는데, 무게가 1.5kg인 뱅가드 1호였다. 이 인공위성은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은 궤도운동을 분석한 결과, 지구는 완전한 원이나 타원이 아닌 서양배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같은 해 미국은 우주개발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했다. , 1962년에 태양관측위성(OSO)을 발사해 인공위성의 시대를 열었다. 태양관측위성은 지구의 위성궤도를 돌면서 태양을 측정했는데, 주로 태양 표면의 폭발과 전파방출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관측했다.

1964년부터 1969년까지는 지구물리관측위성(OGO) 6대를 발사해 지구의 전리층, 밴앨런대, 지구 주위의 성간물질(에틸, 암모니아)등을 관측했다. 19665월에는 통신, 기상관측, 자원탐사, 해양조사 등을 목적으로 응용기술위성(ATS) 6대를 발사했다. 이 인공위성의 발사로 우리는 오늘날 통신중계, 기상예보 등 인공위성을 이용해 실생활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62년에는 민간 자본으로 만든 텔스타 1호가 발사되어 대륙간 통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텔레비전 위성중계가 처음으로 성공해 전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었다. 1964년에는 신콤 3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위성은 36,000km 상공에 이르렀고, 지구의 자전주기와 같은 궤도운동 주기를 갖게 되어, 정지위성 제1호가 되었다. 따라서 위성중계는 하루 24시간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공위성의 실용화시대를 맞이해 여러가지 목적의 인공위성이 이어서 발사되었다. 용도별로 나누면, 크게 과학위성, 통신방송위성, 관측∙측지위성, 군사위성으로 분류된다. 1994년까지 발사된 인공위성의 수는 4515개나 된다. 여기에는 각 나라의 군사위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도 1992년과 1993년에 우리별 1,2호를 발사해 16번째 인공위성 소유국이 되었다. 오늘날 군사위성을 빼고 일상 생활에 활용되고 있는 위성은 기상위성과 통신위성이다. 우리나라도 19958월에 무궁화 1호를 발사하여 통신위성 소유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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